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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2009/02/08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의 단편, 컨텐츠의 일부를 보고 전체에 대한 자신만의 판단을 가진다.

사람 하나하나마다,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라는 정보를 취득하여 고착화한다.

어떤 한 사람에 대한 이미징을 취득한 이후에는,
그 이미징을 업데이트 하긴 어렵다.

어떤 현상에 대해서 갖고 있는 판단 역시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나이를 먹을수록 심해진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경험을 얻을수록 심해진다.

세상을 보는 눈이 컸다고 믿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이 살아온 역사와 취득한 지식에 반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합리화하는데 관대해진다.

자기합리화를 하는데 있어서 부끄러운 정보는 버리고
비슷한 기억은 미화하고 왜곡하여 재기억한다.

편견과 속단은 점점 가속화한다.
세상 만물의 이치에 대한 판단은 점점 더 편견과 속단으로 이른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일부를 보고 전체를 판단한다.

자기만의 그릇에 들어있는 자유에 대해서 관대해지는 대신,
반민주, 자유의 억압에도 또한 관대해진다.

1분 1초는 흘러가고,
계속해서 변하지 않는 사람은 기어코 청춘을 잃는다.
인터넷이 생긴 이후 지식의 양과 전달 속도는 광속으로 빨라졌다.
개인 개인이 취득하는 정보의 양은 그 어느때 보다 많아졌다.

이제는,
중2병을 펼쳐야 할 10대들마저 청춘을 잃기 시작했다.
제목만 보고, 닉네임만 보고,
감독, 음악가의 이름, 출생 계급만 보고 컨텐츠와 행간에 대해 속단하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나이의 문제는 아니였다.

불편한 진실을 피하는 데 익숙하다.
정곡을 찔릴 때 마다 드는 불쾌한 기분에 대해서 뒤돌아 보지 않는다.
피하면 그만이다.
더러운 것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고, 왜곡, 곡학아세, 선동, 조작이라고 폄훼한다.

어떤 힐난이 불편하다는 것은 찔리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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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고,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들이 한나라당 의원을 하거나.
청춘과의 청산을 통해 제도권 이너써클의 카르텔안으로 들어가는 어른이 된 386들을 본다.

또는 존경할만한 가치를 가진 어떤 어떤 블로거들이,
방대한 지식과 그럴싸한 논리로 자기 안에 자기 만의 이데아를 구축하여 벙커를 파는 것을 본다.

현실과 타협해서도 아니고 먹고사니즘도 아니고 자존심의 문제도 아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생겼다는 자기 기만에 빠졌기 때문이다.
청춘을 잃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까지 청춘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이미 반 쯤은 세속에 내주었다.
남은 반의 반 쯤은 열폭인의 소모적 제스쳐로 소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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